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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실기(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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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부터 목차까지만 옮겨 보았습니다.)

 

발간사(發刊辭)

 

어느 성씨에게나 많은 세고(世稿)가 있지만 우리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에 이르면 그 방대한 문자(文字)가 다른 성씨의 것과 더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권씨가 동방에서 가장 먼저 족보(族譜)를 창시하였으니 그 성씨가 비롯한 유래와 시조에 관한 것을 세고로 세운 문자가 많을 것은 예상키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그 분량이 이처럼 많음에는 자타가 모두 놀라 마지 않는 바인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방대한 시조 태사공의 실기에는 안동 권씨 1천년의 편년사(編年史)가 다 집약되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선대는 이러한 기록을 오래 전부터 모으고 묶어 ≪문헌세감(文獻世鑑)≫ 등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였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 많아져 책권으로 수습해 담을 수가 없게도 되고 창상(滄桑)이 거듭 바뀌는 동안 병란(兵亂)과 화재를 만나 소실되어 전함이 없어진 부분도 그 분량을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역대로 이를 다 갈무려 자목(梓木)에 올려 놓았더라면 각급 사승(史乘)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혹은 유실되고 혹은 남아 전하되 너무 분량이 많고 장황한 것은 간추려서 이를 우리 시조 태사공의 실기(實記)라 이름하여 편간해낸 것은 대개 1907년에 정미대동보(丁未大同譜)를 발간한 이후로 상정(想定)되고 있거니와 그 이전에도 이와 같은 시도는 간헐적으로 있었으되 늘 재력이 뒤따르지 못해 그 수많은 문자가 판각(板刻)으로 새겨지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정미보(丁未譜) 이후에 처음 규모로 편간한 태사공의 실기에서 시조를 숭봉(崇奉)하는 일과 관련되는 역대의 제반 문적을 분류하여 안동부사(安東府司)의 태사묘(太師廟)에 관한 부분은 묘사편(廟祠篇)으로 하고 능동(陵洞)의 묘소와 재사(齋舍) 등에 관한 부분은 묘도편(墓道篇)으로 하며 경주(慶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 관계는 운곡사 기사(雲谷祠記事) 등으로 별부(別附)되어 비로소 몇 권의 책질(冊秩)을 이루어 원근의 후손에게 배포되었다. 이후로 이를 어떤 부분은 축약(縮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더욱 보충하기도 하려는 의도로 ≪능동지(陵洞誌)≫가 발간되어 나오고 해방 직전에는 태사공실기의 중간본이 나오기도 하다가 1961년에 신축대동보(辛丑大同譜)를 만들면서는 거의 동시에 ≪능동실기(陵洞實記)≫를 발간하여 전자의 책자 발간 당시 이후에 발생한 사적을 추가할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 누락된 것을 많이 보유(補遺)하였으며 1990년 경오(庚午)에는 ≪능동천년약사(陵洞千年略史)≫를 발간하여 주로 과거 책편에서 소략히 다루었거나 누락시킨 기록 및 임사록(任司錄) 등의 명록과 경주의 운곡서원 및 청도(淸道)의 낭중공(郎中公)을 받드는 봉암재사(鳳巖齋舍)에 관한 장고(掌故)를 모두 집성하였다.

 

이렇게 집성된 기전(記傳)은 각기 그 내용이 같지가 않고 싣고 싣지 않은 참치(參差)가 많으며 거기에도 누락된 일과 이후로 발생한 사적(事蹟) 또한 적지가 않아 이를 다시 총괄하여 편간하는 일이 시급한 일로 여겨졌다. 더구나 기왕의 책질이 모두가 고문(古文)의 순한자(純漢字)로 되어 있어 목하(目下)에 이를 접안(接眼)해 해독(解讀)할 자가 태무(殆無)한 지경이 된 지라 사세가 이러한즉 이를 지금 국역(國譯)이라도 해 놓지 않으면 불일간 사문화(死文化)되는 것을 면치 못하여 이 모든 사적이 특수한 수집가의 품목이나 관련 학자의 연구 자료로나 남는 바 되게 되었다. 이를 모두 총괄하여 국역하고 계고(稽考)하여 새로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발행하는 일은 그 규모가 작지가 않아 현재의 우리 성문(姓門) 대종회의 재정이나 역량으로 착수를 생각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또 오늘날 이와 같은 발간 연구 사업은 전문 학술 연구 기관에 그 용역을 의뢰하여도 쉽지가 않으며 실제로 민간의 이와 같은 용역 수요를 소화해줄만한 기관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이 국역판 태사공 실기를 발간하는 일은 대종회에서 그 사업 계획서를 검토하고 심의하여 이를 결의를 통해 승인하고 그 후속 조치로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열(校閱) 등의 책임을 맡았지만 실제 이를 기획하여 번역 집필하고 편집 제작을 전담한 것은 문사인 저자와 그가 경영하는 출판사이다. 이 저자와 출판사에서는 이미 10여년 전에 안동 권씨의 기전체(紀傳體) 1천년사인 ≪영가언행록(永嘉言行錄)≫을 자체 역량으로 저술·발간하였고 저간에 이와 백중을 이루는 문중 문헌으로서 ≪추밀공실기(樞密公實記)≫와 ≪정간공실기(靖簡公實記)≫를 잇따라 발간한 바 있어 그 축적된 잠재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있음이 자타에 공인된 바이다. 이같은 역량의 저자와 그 출판사에서 이번에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태사공 실기를 발간하는 일은 일련의 이와 같은 우리 문중 문헌 편찬 사업에 하나의 대단원을 이루는 것이라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 이 실기를 편술함에는 기존의 문헌 자료를 국역 해설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다각도의 추리와 분석을 통한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금까지 1천년 동안 극히 제한된 문자에만 매여 진전이 없던 시조 태사공에 관한 연구가 이제부터 보다 확대된 범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이 실기의 총서(總敍)에서는 거듭하여 규명해 내놓고 있다. 2세조 낭중공에 대해서도 제3부 후계(後系)에서 여러 방면으로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수합하여 종합적으로 조명(照明)해봄으로써 당시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마지 않았다. 더불어 지금까지 우리 권씨의 모든 보첩(譜牒)에서 빠져 있어 계대(系代)를 모르던 고려 중기의 명현(明賢) 좨주공(祭酒公) 권적(權適)이 바로 우리 태사공의 7세손임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은 이 실기의 편찬 도중에 부산된 최대의 사건이며 이 좨주공과 자손 일가가 태사공의 혈손으로 밝혀짐에 따라 우리 권문의 씨족사는 크게 수정해 쓰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백년 동안 미해결이던 급사중공(給事中公)의 계대 문제가 고려 고종(高宗) 33년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명문 기록으로 국학 학유(國學學諭)로서 울릉도 안무사(鬱陵島安撫使)로 파견된 사실이 밝혀져 사서(史書)에 명기된 권형윤(權衡允)이라는 인물이 추밀·복야공(樞密僕射公)과 동시대인임이 명증됨으로써 구름이 걷히듯 해결된 것 또한 이번 실기 편간이 이뤄낸 쾌거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상에 몇 가지 예거(例擧)한 사실만으로도 이 실기에 대한 우리 문중인의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세상의 일이 모두 그렇지만 이 책이 이만큼 이루어져 나오게 된 이면에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과 노력이 경주된 바 있고 고통과 희생이 그에 수반하였다. 이같은 고난의 저술 활동에 대한 독자의 높은 경의와 보답은 이를 잘 열독하는 것일 것이다. 경전에 '네가 태어난 것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태어난 바는 곧 우리를 태어나게 한 우리의 선대이다. 그 선대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 선대가 어떤 것인지를 인식하지 않고는 안된다. 우리 시조 태사공의 후예로서 안동 권씨의 성관(姓貫)을 받아 태어난 자 모두는 이 실기를 숙독하는 것으로써 그 태어남을 욕되게 하지 않는 일을 비롯해야 할 것이다. 

 

2000년 경진(庚辰) 2월 상순

안동권씨대종회장(安東權氏大宗會長) 

태사공실기편찬위원장(太師公實記編纂委員長) 

시조후(始祖後) 35세손(世孫) 권오규(權五奎)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