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守平):추밀공(樞密公)
추밀공(樞密公) 수평(守平)의 단소(壇所).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현암(玄巖)에 있다.
상서공(尙書公) 중시(仲時)의 장자로 10세대파의 제3파인 추밀공파(樞密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고려 명종(明宗:1171∼1197) 연간인 1180년대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휘가 수평인 것 외에 자호(字號)는 알려져 있지 않고 관직이 정3품 광록대부(光祿大夫)로서 요직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기 때문에 추밀공으로 호칭한다. 공이 출생한 곳은 안동(安東)으로 추정되고 그곳에서 세습(世襲)의 향직(鄕職)을 받기 전에 경사(京師)인 송도(松都)로 진출한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공은 본향 안동의 호족(豪族)으로서 세전의 기득권을 누리며 안주하던 처지에서 떨쳐 일어나 최초로 경사에 진출한 태사공의 후예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좨주공(祭酒公) 적(適)이 태사공의 7세손으로 확인됨에 따라 그 기록은 파기되게 되었다.
다만 공의 후손은 크게 번연(蕃衍)하여 안동 권씨 10세대파 중에서 최대자(最大者)가 되었으나 좨주공의 후세는 기록상 그 손자의 대에서 후사(後嗣)가 멸실(滅失) 내지 실종(失踵)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후손을 이어 번창시킨 선세로서는 공이 최초로 경사에 진출한 조선(祖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에 공이 등장하는 것은 공에 앞서 서울로 진출해 현달했던 좨주공 일파로 추정되는 제권(諸權) 인물이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변으로 척퇴(斥退)되거나 스스로 화를 피해 자취를 감춘 이후이다. 그래서 좨주공 일가의 제권이 모두 경사 진출에 어떤 도움을 주었거나 반연(攀緣)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취가 없다. 공은 대개 최충헌(崔忠獻)과 동시대인이긴 하나 그보다 1세대 정도 뒤졌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좨주공계의 제권은 최충헌의 집권 초기 평장사(平章事) 권절평(權節平) 부자가 화를 입는 것을 전후하여 중앙 무대의 망족(望族)으로서 모습을 감춘 뒤였던 것이다. 우리 권씨의 씨족사(氏族史)에서 공이 경사로 진출한 것은 또한번 큰 의의를 갖는다.
공의 시대는 고려가 개국한 지 이제 3백년이 되어 신라의 유호(遺豪)는 그 세력이 완전 순치(順馳)되어 호장(戶長) 등은 향방(鄕方) 고을의 아전으로 전락해 가는 상태였다. 또 태사공과 그 자손은 후백제 견훤(甄萱)에의 국수(國?)를 갚고자 신흥 고려에 귀속하였으나 멸망한 종국(宗國) 신라에의 복고적 정서를 떨치지 못하여 대개 안동 본향을 고수하며 세수가전(世守家傳)에 매이다 보니 새로운 세상과 문물에의 진취에 있어 다소 뒤처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 종계(宗系)에서 5세에 이르러 지차(支次)로 벗어나는 추봉공(追封公) 좌섬(佐暹)의 일계(一系)가 본관을 벗어나 경사로 진출하여 7세 좨주공 적(適)으로부터 추밀공 준(濬) 및 평장사 절평(節平) 등에 이르기까지 3∼4세에 걸쳐 크나큰 저력을 보이며 현달하다가 거듭되는 무신란(武臣亂)의 시변(時變)에 피화(被禍)하여 불행히 족멸(族滅)되는 참상을 면치 못했다. 이후로 권씨는 다시 향족으로 퇴영(退?)하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터에 공이 다시금 경사로 진출하여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권씨가 중흥(中興)하는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공 또한 부친 상서공 중시(仲時) 때부터 종계에서 벗어나 지차가 되었기 때문에 세수지(世守地)인 안동에서 떠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좨주공 적(適)의 일가 계열이 먼저 경사에 올라가 닦아 놓은 기반이 흔적조차 없어진 근기지역(近畿地域)으로 가문의 재진취와 도약을 위해 이향상경(離鄕上京)을 결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태사공실기
1,262쪽에서 발췌